나의 이야기

2011년 건축잡지 와이드에 나상진 선생관련 기고 원고

행복철철 2012. 6. 7. 04:14

 

건축가 나상진 우리에게 돌아오다.

2000년대 이전까지 건축가 나상진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전무하였다. 다만 그의 몇 작품이 시대적 배경으로 언급되는 정도였다.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 이후(건축가 나상진과 그의 작품에 관한 연구, 2001)의 연구는 목원대 김정동 교수의 “나상진과 그의 건축활동에 대한 소고”(한국건축역사학회, 2010)가 유일할 것이다.

그동안 과도기 건축가, 1세대 건축가, 근대기 건축가 등으로 불리는 한국전쟁 이후 활동한 건축들 중 몇몇의 스타 건축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꿈마루로 탈바꿈한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가 건축가 나상진을 재조명하게 된 근래의 현상은 이런 이유에서 한국 근현대 건축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흥분되는 일이고, 또한 이러한 건축가를 소개하게 되는 것도 영광스런 것이라 생각한다.

 

건축가 나상진의 간략사

나상진은 1924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하였다. 1940년에 전주공업학교를 졸업하여, 1942년까지 서울에서 일본인 청부업자에게 실무를 배우던 중 1942년에 토건회사인 鹿島組(카지마쿠미)에 입사를 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대양토건(大洋土建)의 기술진에 속해 있다가 1950년대 부터 을지로와 명동 등지에서 나상진설계사무소를 운영하였다.

1960년대 5. 16 이후 나상진은 정부와 관련된 많은 일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정치적 색채가 짙은 안가를 상당수 설계하였고, 정부 관련시설을 많이 설계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발표하지 못한 작품이 많아 상대적으로 다른 건축가들보다 빨리 잊혀진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1970년 한국건축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73년 지병으로 작고하기까지 건축과 도시에 관한 탁월한 이론이나 작품적 이상을 글로 남긴 적은 없지만, 다양한 작품을 통해서 새로이 받아들인 건축문화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실험해본 건축가로 그의 후인(유족 및 나상진설계사무소 소원)들은 기억하고 있다.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 - 폴 루돌프(Paul Rudolph), 그리고 故 함성권 교수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는 당시 청와대에서 워커힐로 이동하는 중간에 위치한 이 대지에 전시적인 건축물이 필요하다는 정치계의 판단 하에 국가적으로 추진된 골프장 건설사업이었다. 우연찮게도 나상진은 청와대의 여러 시설과 워커힐에 이미 관련되어 있었다.

이 주목할 만한 건축물은 두 인물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미국의 건축가 폴 루돌프(Paul Rudolph)와 한양대의 故 함성권 교수가 바로 그들이다.

건축가 김춘웅(상지건축 회장)과 이현호 교수(중앙대)에 의하면 1960년대 중․후반 나상진설계사무소에서 폴 루돌프의 작품집은 가장 인기 있는 책자였으며, 나상진 역시 그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폴 루돌프에서 영향을 받은 건축 형태적 감각을 한국에 실현함에 있어 故 함성권 교수에게서 구조 및 기술적 조언(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의 Twin Column과 캔틸레버 등)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건축물이 바로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다. 특히 일명 “루돌프 콘크리트”라 불리는 노출콘크리트의 사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건축물이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와 제일은행 인천지점(현 SC제일은행 인천지점)이다

 

이렇게 탄생한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는 그 형태 및 구조의 탁월한 아름다움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건축물은 전형적인 모더니즘 양식의 수직과 수평을 강조한 상부구조와는 대조적으로 대지와 접합하는 하부구조는 자유로운 형태의 평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나상진은 전형적인 모더니즘 형태의 건축물이 한국에서 어떻게 대지위에 앉혀져야 하는지에 대한 해법으로, 저층부의 외벽에 자연석을 자유롭게 쌓아올려 전통적인 기단을 형성케 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러한 수법은 그의 몇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작품의 매력이 우리시대에 건축가 나상진을 다시금 기억하게 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건축가 나상진을 추억하며

끝으로 필자가 건축가 나상진에 대한 석사논문을 진행하던 2000년에 인터뷰했던 그의 지인들의 추억을 곱씹으며 2011년 우리에게 돌아온 건축가 나상진을 추억해 보고자 한다.

“나상진은 감감이 좋아. 그리고 부친이 동양화가였지. 유명한 화가는 아니지만 그 아버지에게서 선천적인 감각을 타고났다고 봐야지.”(엄이건축 엄덕문 고문)

“나선생은 굉장한 멋쟁이셨다.” (중앙대 이현호 교수)

“나선생은 나서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셨다. 그분이 얘기하는 촌놈정신이라는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다. 그래서 발표된 작품이 별로 없었다. 또한 디테일에 상당히 박식했었다. 특히 접합부분 디테일에 관해서는 당시 건축계에서 가장 뛰어났을 것이다.”(상지건축 김춘웅 회장)

“나상진 선생은 설계사무소의 위상이 나라를 대표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과 발전적인 작품을 창출하신 건축가였다고 기억한다.”(서전건축 정성환 대표)

“나선생은 건축 선배들과 대인관계가 아주 좋았다. 건축하는 사람 특유의 아집이 없었다. 상당히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그리고 부의 축적은 초월한 사람 같았다. 설계업을 돈벌이로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두이건축 박종구 고문)

“디테일에 밝았으나, 디자인 감각도 탁월하였으며, 시골스럽고, 민족적인 정서 쪽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김수근, 김중업씨 등 당시 인기 있던 건축가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인물이었다.”(무량건축 주길중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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