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이야기

[스크랩] 서울 도시 속 숨겨진 제국의 탄생과 비극

행복철철 2012. 10. 4. 11:09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신대륙 발견, 종교 개혁 등 변화의 움직임은, 유럽인의 삶, 인식 구조를 빠르게 변화시켜 나갔다. 이런 움직임은 중동을 거쳐 동아시아까지 이르게 되어, 변화의 싹이 움트고 있던 조선까지 영향을 주었다.

조선은 유교 의례상 상국이었던 중국과 같은 지위를 가질 수 없었고, 중국의 지위인 황제보다 낮은 왕의 호칭을 쓸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전해진 변화의 움직임은 이러한 세계관에 변화를 주고 있었다.

 

1884년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조선의 지위를 황제로 올리려고 하였지만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이후 이러한 노력이 계속 되었다. 이런 조선의 움직임은, 당시 열강 중 하나인 일본을 자극하였고,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이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는 1896년 2월 러시아 공관(아관)으로 거처를 옮기(파천)었다.

 

그 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파천한 지 약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정상을 되찾으면서 ‘칭제건원(稱帝建元)’이 추진되었다.  8월,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친 조선은 고종의 황제즉위식에 앞서, 경운궁(현 덕수궁) 대한문과 마주보는 자리에 제국 예법에 맞는 제단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그 후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함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자주독립국가임을 세계에 알렸고, 적극적으로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경운궁 안에도 신식 양식을 받아들인 '석조전', '중명전', '정관헌'등 건축물을 세웠다.

 

'석조전'은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신고전주의 석조건물로, 임금의 집무실과 침전이 나뉘어 있던 기존 궁 건물과 달리 이를 하나로 모은 건물로 만들어졌다. '정관헌'은 서양식 정자에 동양적인 요소를 접목시킨 건물로 고종이 손님 접견이나 다과를 즐긴 곳으로 이용되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주독립국으로써 기초를 마련했지만, 국내외에서 밀려오는 변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국내에선 대한제국 성립을 위해 힘을 모았던 독립협회파와 친러시아파 사이의 갈등이 진행되었다.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독립협회파와 전제군주제 유지를 요구하는 친러시아파의 주장이 대립하였다. 국외에선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열강이 대한제국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내각, 행정 개혁을 실시하고 1904년 국외중립을 선포하며 변화에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 주권 침략을 시작, '군사경찰훈련'으로 치안권을 빼앗으면서 점차 '반식민지화'를 진행하였다.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 11년 일본은 이토(伊藤博文)를 특명전권대신으로 파견하여 황제 고종에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일본통감의 지배를 받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을사조약'을 중명전에서 체결하였다. 황제 고종은 이 조약의 체결을 반대, 조약체결의 불법성을 강조하였으나,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사라지게 되었다.

출처 : 도심RPG in Hi Seoul
글쓴이 : 도심RPG 운영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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